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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2. <요재공>증호조참판공휘성유행장(贈户曹叅判公諱成裕行狀)
1. 문헌 목록 〉23. 23世 〉4. <요재공>증호조참판공휘성유정부인이씨묘표(贈户曹叅判公諱成裕貞夫人李氏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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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요재공>증호조참판공휘성유묘갈명(贈户曹叅判公諱成裕墓碣銘)
贈户曹叅判公諱成裕墓碣銘 淳化郡西北三十里强文峙右峰桶亥坐隆然四尺 贈户曹參判趙公諱成裕字準瑞之藏多士擧其孝行初贈童蒙敎官旌閭加 贈以子恒順貴也公以 純祖己卯生得年僅三十六卒于 哲宗甲寅八月十日鳴呼短矣而以老死而無聞者孰夭而孰壽幼異凡兒不離長老側給事瞻敏養親兼志體嘗雪裡得花蛇己親癠鄉里藉藉天感初終葬祭情文備至喪餘前期齋沐凡奠物躬親位之雖皮毛不用棄之屏勿令踐踏上塚撫松盤桓不忍遽歸兄弟別居而朝往夕來未嘗一日阻家衆雖微賤恩以懷之義以訓之晦跡務農爲己分而凡他人是非不及於唇吻此皆孝子之至行也臨圽謂夫人曰吾早失怙恃不孝孰大幸有一孤須善養無絶先祝盖知夫人之性行必不爲未亡人在世也夫人受遺言敎子以義方竟立其家而所從有地後公四十餘年以天年終人謂夫人之不死絶勝於他人之死與夫子同日幷旌盖曠世異典也趙氏玉川著姓高麗侍中璋爲初祖密直副使洪珪版圖判書佺三重大匡元吉皆其顯祖而樂齋瑛以副正麗季岡僕屢徵不起司正龜山又以孝聞三世而 贈大司麻쀯壬辰斬賊無算竟殉義錄武勳自是屢世文行名在仕籍而孝爲家風至諱德弘 贈司僕正卽公祖也考殷國 贈工曹叅議有家訓皆格至妣昌寧曺氏貞靜有閨範夫人全州李氏世臣女一男卽恒順同中樞娶全州李聖燦女二女適都事鄭學聖監察崔箕燦男六完珹都事娶海州崔鍾植五衛將女完曄娶南陽房伯圭女完斗娶靈光丁相鉉女完龍娶全州李承暉女完俊娶高興興柳燃旭女完洪幼孫女二適康津金煥豊全州李成文完珹男鎭顯娶全義李熙汝女鎭纓鎭汶幼女適全州崔圭璿完曄男鎭浩女幼完斗男鎭泰完斗來徵銘趙氏多吾從逐得詳其世不敢辭銘曰 玉川之趙忠孝名族公又肖孫世風日篤王鯉孟筍古有今覿瞻彼道周煌煌綽楔是夫是婦 命旌同日文峙之阡我躬式鞠 丁未 李秋之晦 幸州 奇宇萬 撰 증호조참판공휘성유묘갈명(贈户曹叅判公諱成裕墓碣銘) 순창군 서북쪽 三十리 되는 강문치(強文峙) 오른쪽 봉우리 해좌(亥坐)에 우뚝 솟은 四자 높이의 무덤은 증호조참판 조공(趙公) 휘(諱) 성유(成裕) 자(字) 준서(準瑞)의 묘이다. 선비들이 그의 효행을 천거하여 처음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추증(追贈)하여 정려를 내렸다가 후에 아들 항순(恒順)의 추은(推恩)으로 호조참판을 올려 추증한 것이다. 공은 순조(純祖) 기묘년(一八一九)에 태어나 겨우 三十六歲를 살고 철종(哲宗) 갑인년(一八五四)에 돌아가셨으니 너무 짧은 생애였다. 그러나 오래 늙도록 살고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사람에 비교하면 누가 일찍 죽고 누가 오래 살았다고 하겠는가? 공은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라서 어른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민첩하게 심부름을 하였으며 양친을 효성으로 섬겨 뜻을 받들고 음식 봉양을 잘 하였다. 한번은 눈 속에서 화사(花蛇)를 잡아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하니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는데 하늘이 효성에 감동해서 그런 것이다. 초상(初喪)과 장례, 제사에 정성과 제물을 두루 갖추고 목욕 재계한 다음 친히 감독하여 비록 버리는 피모(皮毛)라도 한쪽에 버리면서 사람들이 밟지 못하게 하였다. 무덤 위에 올라가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배회하면서 차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형제가 따로 살았으나 조석(朝夕)으로 왕래하여 하루도 만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집안의 낮은 하인이라 하더라도 은혜로 감싸주고 의리를 가르쳤으며 자취를 감추고 농사에 힘쓰시고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니, 이런 점들이 효자의 흘륭한 행실이다. 임종(臨終)때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 부모님을 잃었으니 이보다 더 큰 불효(不孝)가 어디 있겠소. 다행히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잘 길러서 선대의 제사를 끊어지지 않게 해주오.」하였는데, 이는 부인의 성품으로 보아 따라서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부인은 그 유언(遺言)을 따라서 아들을 의리로써 가르쳐 성취시키고 남편이 돌아간 지 四十餘年 후에 천수(天壽)를 누리고 돌아가셨는데 사람들은 부인이 남편을 따라서 죽지 않은 것이 남들이 죽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한다. 남편과 같은 날 정려(旌閭)를 받았으니 세상에 드문 은전(恩典)이었다. 옥천조씨(玉川趙氏)는 저명한 성씨로 고려 시중(侍中) 장(璋)을 시조로 한다. 밀직부사(密直府使) 홍규(洪珪), 판도판서(版圖判書) 전(佺), 삼중대광(三重大匡) 원길(元吉)이 모두 현달한 조상이며 요재공(樂齋公) 영(瑛)은 부정(副正)으로 고려 말에 절의를 지켜 나라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사정(司正) 귀산(龜山)은 삼세(三世)가 효행으로 알려져 대사마(大司馬)에 추증(推贈)되었으며 훈(쀯)은 임진왜란 때 적을 무수히 죽이고 순절(殉節)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이후 여러 세대 동안 문학과 행실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효도를 가훈(家訓)으로 삼았다. 휘 덕홍(德弘)에 이르러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되었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할아버지이시다. 아버지의 휘는 은국(殷國)인데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가정의 가르침을 잘 지켰다.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정숙한 부덕(婦德)이 있었으며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세신(世臣)의 따님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바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항순(恒順)이다. 항순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성찬(聖燦)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두 딸은 도사(都事) 정학성(鄭學聖)과 감찰(監察) 최기찬(崔箕贊)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여섯인데 완성(完珹)은 도사(都事)로 해주(海州) 오위장(五衛將) 최종식(崔鍾植)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완엽(完曄)은 남양(南陽) 방백규(房伯圭)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완두(完斗)는 영광(靈光) 정상현(丁相鉉)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완룡(完龍)은 전주(全州) 이승휘(李承暉)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완준(完俊)은 고흥(高興) 유연욱(柳燃旭)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완홍(完洪)은 아직 어리다. 손녀 둘은 강진(康津) 김환풍(金煥豊)과 전주 이성문(李成文)에게 출가하였다. 완성의 아들은 진현(鎭顯)인데 전의(全義) 이희여(李熙汝)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진영(鎭纓)과 진문(鎭汶)은 아직 어리며 딸은 전주 최규선(崔圭璿)에게 출가하였다. 완엽의 아들은 진호(鎭浩)이며 딸은 어리다. 완두의 아들은 진태(鎭泰)이다. 완두가 와서 묘갈명을 청하는데 조씨들이 나에게 배우는 자들이 많아 사양할 수가 없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옥천조씨 충효의 명문인데 玉川之趙 忠孝名族 공이 또 이를 본받아 그풍도 도탑네 公又肖孫 世風日篤 겨울에 잉어잡고 죽순 나온 일 지금도 있어 王鯉孟筍 古有今覿 저 길가를 바라보니 정려가 찬란하네 瞻彼道周 惶惶綽禊 이 부부가 같은 날에 정려받았는데 是夫是婦 命旌同日 문치의 무덤에 우리들 경의(敬意) 표하세 文峙之阡 我躬式鞠 丁未年 구월 그믐날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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